인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마르크시즘을 처음 접할 때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선배들은 종종 다른 얘기를 하곤 했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쇼부의 역사이다.” ㅡㅡ;;

물론 여기서 ‘쇼부’는 일본어 ‘勝負’, 승부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뭐, 일본어에서 오긴 했지만 ‘쇼부를 치다’, ‘쇼부 때리다’에서와 같이 ‘흥정’이나 ‘타협’ 정도로 묘하게 변형된 은어로서의 의미이다.

농담처럼 말하고, 우스개로 넘어가곤 했지만 뒤에 생각해보니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정치적 타협으로 상황을 넘어가야 했던 것에 대한 비난과 자조가 그 말에 담겨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삶과 세상에 대한 깊은 고민 속에서 원칙과 관점을 세우고, 그것들 돌아보며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뭐, 그런 생각도 들고 요즘엔 대체 뭔 생각을 하며 사는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이런 생각이 났다.;;

[#M_ 그리고 별 상관 없는 얘기지만, 이거... | 쇼부치는거 아냐? ㅡㅡ;; |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 버리시렵니까? 죄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소돔성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죄없는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겠읍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저 곳에 죄없는 사람이 사십 오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사십 명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하고 여쭙자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사십 명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 여쭈었다.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읍니다. 삼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그가 "삼십 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시자 그가 또다시 여쭈었다.
"죄송하오나, 다시 말씀드리겠읍니다. 만일 이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그가 "이십 명만 되어도 그들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아브라함이 다시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읍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 되어도 되겠읍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창세기 18:23-32)

_M#]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황금가지, 전4권

“피를 마시는 새”의 연재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읽어봤다.(사실 앞 부분은 통신 연재를 통해 읽었기에 3,4권만 사서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1,2권을 구입했다.;;)

독자를 정신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전개와 문장이야 이전부터 정평이 나 있던 터이고, 톨킨이 창조한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거기에 현실성을 부여한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영도의 전작들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작가의 입이 되어 주제를 설파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소설이 아니라 논설문을 읽는 기분마저 느꼈고, 이것은 문학 작품으로서는 꽤나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극복한 모습을 보인다. 작가의 통찰은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구성된 세계는 등장 인물을 움직인다. 여전히 등장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주장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입으로서가 아닌 재구성된 세계의 한 구성 요소로서이다.

물론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도 주제 의식은 비교적 뚜렷이 드러나 있는 편이다.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작가의 일관된 주제 의식인 ‘관계’와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큰 변화를 보이는 것 같진 않지만, – 나로 말하자면 (내가 이해한) 이영도의 세계관이 그럭저럭 맘에 든다.;; –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두터워져 더 많은 세부적인 주제를 포괄하고, 풍성한 내용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삶과 세계를 고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만 넓고 깊게 펼쳐진 사건의 그물이 결말을 온전히 끌어올리지 못하여 막바지를 듬성듬성 봉합해 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유감이다. 어째서 케이건은 나늬를 보는 것 만으로 복수를 포기했는지, 갈로텍의 내적 갈등이 대체 어찌 되었는지, 사모 페이는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뭐, 내 이해력 부족이라거나 작가의 의도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덧 – “눈물을 마시는 새”의 주인공은 사모 페이님이시다. 그를 제외한 최고의 등장 인물은 데오늬 달비다. 이건 누가 – 심지어 작가가 – 뭐라 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유대와 이슬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사악이라고 하여라. 나는 그와 나의 계약을 세우리라. 그와 그의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영원한 계약을 세워 주리라. 이스마엘을 생각하고 하는 네 말도 들어 주리라. 그에게도 복을 내려 자손이 많이 태어나 수없이 불어나게 하겠다. 그에게서 열 두 영도자가 나서 큰 민족이 일어나게 하겠다. 나의 이 계약은 사라가 내년 이맘 때 너에게 낳아 줄 이사악에게 세워 주는 것이다.” (창세기17:19-21)

학교 다닐 때 빵꾸를 때우기 위해 계절학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문화인류학 과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수업에서 무슬림인 여학생이 이슬람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슬람에 대해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 모르는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꽤 흥미진진하게 들었는데,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다고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때는 ‘이슬람에서는 그렇게도 얘기하는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성경에 근거가 있는 얘기였다.

유대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인 몸종 하갈의 자식인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본처인 사래의 자식인 이사악이다. 물론 본처의 자식인 이사악을 유대 민족의 직계라 하여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창세기 16장부터 나오는데 별로 좋은 얘기가 없다.

아브람이 하갈과 한 자리에 들었더니, 하갈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하갈은 그것을 알고 안주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창세기16:4)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창세기16:11-12)

이후 창세기 21장에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스마엘이 아랍 민족의 시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사악의 상속권을 확실히 하려는 사래에 의해 쫓겨나 브엘세바 빈들을 헤매게 되었는데, 신께 버림받진 않았는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해 주셨다. 그는 자라서 사막에서 살며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다.”(창세기 21:20)

여기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이 같은 신이라는 성서적 근거를 얻게 된다. 성경에서는 이사악(유대 민족)이나 이스마엘(아랍 민족)이나 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느님께서 이스마엘 또한 돌보셨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은 이사악에게 주고 있고, 몸종의 자식이라느니 본처를 업신여겼다느니 하는 얘기도 있지만 액면 그대로 믿기는 곤란하다.

위에 인용한 창세기 16장 11절에서 12절까지를 현재의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의 대립을 예언한 것이라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오히려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 적대적이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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