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Posted by ИСКРА on March 6, 2004 at 3:53 pm.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예로부터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말라 하였다.
취미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좋고 싫음의 감정에 기초해 있다.
옳고 그름이 언제나 좋고 싫음에 일대일 대응하는 것이 아니므로 애초에 논쟁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바보스러운 논쟁이 바로 종교에 대한 것이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1

이른바 과학적 태도라는 것은 어떠한 믿음에 대해 타당한 근거와 개연성을 요구한다. 그것이 충분치 못할 경우 그 믿음은 거부되거나 최소한 판단을 유보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 믿음은 판단의 ‘결과’이다.

이와 달리 종교에서는 믿음이 ‘전제’로서 요구된다. 일단 믿어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든 뭐든 근거가 보이게 되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때문에 둘 사이의 논쟁은 불가능, 아니 무의미한 일이 된다. 그런데 러셀은 무모하게도 종교에 대해 딴지를 건다. 그의 기준은 두 가지다.

종교의 진실성 - 신 존재 증명

러셀은 엄밀히 말해 무신론자라기 보다는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신의 비실재를 증명할 수 있다기보다는 신의 실재는 증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질문은 우리의 개연적 지식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증명될 수 없고, 증명하려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는 철저한 경험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판단의 근거가 불충분하고, 신을 가정하지 않고도 현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은 거부되거나 최소한 유보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중세 초기의 교부철학으로부터 현대의 창조과학까지…
많이 알려진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우선 존재론적 증명이 있는데 안셀무스가 그 대표자이다. 이것은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좀 쉽게 얘기하자면 신은 ‘완벽한 존재’인데,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실재해야 된다는거다.

칸트는 이러한 생각을 비판하면서 도덕론적 증명을 시도했다. 선악에 대한 기준, 즉 도덕률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순수이성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천이성에 의해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된 인과론적 논증, 또는 우주론적 논증이 있다. 우주에는 원인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그 원인을 하나씩 추적해 들어가면 최초의 원인, 자기 자신 외에는 원인을 갖지 않는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목적론적 논증이라든지 실존적 논증 등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있지만, 모두 논리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종교의 유용성

책 내용 중에도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코플스톤 신부2와 러셀의 논쟁 부분이 있다. 코플스톤 신부가 아퀴나스의 인과론적 증명을 예로 들자 러셀은 “모든 인간에게는 어머니가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어머니’라는 존재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말로 반박한다. 그러자 코플스턴 신부는 다시 러셀의 비판이 기초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기도 한다.

달리 생각하면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반드시 신의 존재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기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믿음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른 과학과 종교가 더이상 그 주제로 논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측면으로 러셀은 종교가 인류 사회에 무익하며 오히려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의 부정적 영향의 사례들을 아무리 끌어모아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긍정적 역할을 한 예도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을테니… 실제로 어떤 이는 러셀이 종교의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에 대해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급진적인 종교 비판가들은 종교는 본질적으로 반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비록 부분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종교의 본질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며 일시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영혼과 정신, 현세와 내세,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이상적인 상태와 현실적인 상태로 세상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부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아니면 트리에르 지방에서 발생한 묵시론의 일파3이든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희망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해 있는 이상은 결국에는 마찬가지이다.

종교 비판?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유물론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개인적 차원에서 신앙의 의미까지 모조리 부정할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안된다. 또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종교인도 꽤 많다고 생각하며, 종교를 가진 이들과도 좋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다.(이건 내 생각일 뿐인가? ㅡㅡ;)

종교에 대한 논쟁은 이론적 날카로움을 다듬는데는 유용할지 몰라도 실제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서로에게 꽤 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다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어느 쪽이든지,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필요한 것은 ‘비판의 무기’가 아닌 ‘무기의 비판’이다. 서로 전혀 다른 입장이 그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보다 유효한 전장은 회의실이 아니라 현장이다.(춤추는 대수사선? ^^;;)

그래서 나는 러셀의 글을 종교에 대한 논리적 비판의 지침이라기보다는 합리적 인간이 가져야 할 반성적, 과학적 태도, 그리고 그것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예시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각주
  1.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편찬,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1995
  2. Frederick Copleston(1907-1994). 영국 출신의 카톨릭 사제이자 철학자. 철학 전공자들에게는 9권짜리 “철학사”의 저자로 익숙한 사람이다.
  3.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1994
    트리에르는 마르크스의 고향이니 결국 ‘트리에르 지방에서 발생한 묵시론의 일파’는 마르크시즘을 뜻한다. 진중권은 이 말이 마르크시즘 전반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특정한 태도, 다시 말해 광신적이거나 교조적인 태도를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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