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제에서 과연 협상은 가능한가?
25 11 2004 No Comments
in RedEye Tags: 연봉 협상, 연봉제, 임금, 포괄임금정산제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연봉 협상에 대한 포스팅들이 간간히 올라오고 있다. 90년대 일부 직종에 연봉제가 도입된 지 몇 년이 지나 이제는 대부분의 사무직 노동자에게까지 확대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몸값을 올리는 방법’이라든지 ‘연봉 협상 10계명’ 같은 구인 업체의 글들이 올라오곤 하는데, 좀 냉정한 이야기로 다 소용 없다. 임원급의 간부나 특정 분야의 연구 개발직에 종사하는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연봉제에서 협상은 형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연봉제의 현실적 의미
연봉제에 대한 정의는 학자에 따라 다양하나, 대략 “임금의 전부 또는 상당부분을 근로자의 능력,실적 및 공헌도 등을 평가하여 연단위로 결정하는 제도”로 정의할 수 있음
<연봉제 관련 노동관계법의 적용기준> (노동부지침 임금 68200-65 2002.01.30)
위에서 보듯 연봉제는 단순히 임금을 연 단위의 총액으로 결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능력과 실적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능력을 개발하고 열심히 실적을 쌓을수록 임금이 높아지니 언젠가는 고액 연봉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젖게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연봉제는 기업이 인건비를 절감하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시 말해 덜 주면서 더 부려먹기 위해 도입한 방법이다. 제한된 직종의 극소수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을 마치 능력을 키울수록 자신도 좋고 회사도 좋은 합리적인 시스템인 양 선전하며 전체 노동자에게 강제로 적용시키려는 것이다.
능력과 실적을 평가하는 합리적 기준이 있는가?
없다. 당연하다. 독립적으로 일하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업무에는 능력과 실적을 평가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부서나 팀이라 해도 연봉 협상은 개별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평가 역시 개별 노동자에 대해 이루어진다. 결국 같은 일을 똑같이 하고서도 연봉의 차이가 날 수도 있고, 사용자에게 잘 보이는 사람이 많은 연봉을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옆자리의 동료는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
기업은 인건비 상한액을 결정해놓고 연봉 협상을 한다. 내 연봉이 올라가면 동료의 연봉이 줄어들고 동료의 연봉이 올라가면 내 연봉이 줄어든다. 기업은 능력있는 사람을 대우해주기 위해 인건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몇몇 고액 연봉자들을 만들어 놓고, 그 이외의 사람들의 연봉 총액을 줄임으로써 인건비를 절감한다.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서는 동료를 짓밟아라. 연봉제는 윈-윈 게임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이다.
협상은 가능한가?
임금 결정의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사용자다. 백날 실적과 능력의 근거를 제시해봐야 사용자 쪽에서 매출액이 어떻고 인건비 비율이 어떻고 하면 개별 노동자는 속수무책이다. 구조조정같은 분위기의 말을 흘리기 시작하면 당장 안 짤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애당초 기업과 개별 노동자의 불평등한 위치를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통한 집단적 교섭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인데, 연봉제는 이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을 개별화한다.
연봉제의 악용
따로 악용 사례를 들 것도 없이 대부분의 경우 연봉제 자체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지만, 이것을 넘어 사용자가 악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연봉액을 줄이기 위해 고의로 평가를 조작하는 경우, 연봉액을 일방적으로 삭감하여 퇴사를 종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며,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 연봉 인상을 미끼로 회유를 시도하기도 한다. 연봉제라는 이유로 각종 수당을 삭감하거나 아예 없애고 법정 퇴직금마저 주지 않으려는 것은 중소 기업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길은 있는가?
연봉제 도입을 막는 것이 최선이다. 일단 연봉제가 도입되면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막고 되돌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이미 연봉제가 도입되어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차선의 방법으로는 연봉에 포함되지 않는 임금 부분을 어떻게든 확보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연월차수당과 연장수당과 같은 부분을 연봉에 포함시키는 포괄임금정산제1 는 매우 위험하다. 잘못하면 뼈빠지게 야근하고도 능력없어서 오래 일한다는 말만 듣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에 대해 개인적인 협상이 아니라 집단적인 교섭으로 회사와 협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만병통치 처방으로 도입되는 연봉제는 개별 노동자들에게 들이밀어진 시퍼런 칼날이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회사 눈치보며 빡세게 일할지라도 그에게 고액 연봉의 길이 열릴지,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의 문이 열릴지는 모를 일이다.
- 포괄임금정산제는 정해진 금액 안에 각종 수당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임금 계약이다. 예를 들어 기본급이 80만원이고 포괄임금으로 월 100만 원을 받기로 하였다면, 연장 근무를 아무리 많이 해도 받을 수 있는 임금은 월 100만 원이다. 또한 실제 연장 수당을 계산하였을 때 기본급이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포괄임금정산제 아래에서는 최저임금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 노동부의 입장이기 때문에, 최저임금법을 피해가려는 사업주들에게 악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포괄임금정산제는 서면으로 명시되어 있어야 하므로 사업주가 포괄임금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포괄임금정산제를 적용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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